신라 성덕왕릉(사적 28호 )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효소왕릉에서 길을 따라서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우측 논 바닥 중앙에 비몸이 없는 깨어진 귀부가 보이고 좌측 길을 따라 들어가면 축 늘어진 소나무 사이로 성덕왕릉이 보입니다. |
많은 신라 왕들 중에서 대부분 성덕대왕 신종 때문에 성덕대왕은 많이 아실 겁니다. 대분의 신라 왕릉들이 괘릉만 제외하고는 별다른 석물들이 없는데, 이 곳에도 괘릉에 버금갈 정도로 봉분 4면에 사자 석상이 있으며, 문인석도 세워져 있습니다. 우측의 문인석은 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만, 좌측의 문인석은 훼손되어 일부 상반신의 깨어진 돌만 남아 있습니다. |
봉분 앞에는 상석(혼유석)이 있으며, 봉분 주변은 난간석으로 둘려져 있습니다. 또한, 봉분은 면석으로 둘려져 있으며, 대부분의 왕릉은 면석에 12지신상이 새겨져 있습니다만, 이 곳에는 면석이 아니라 면석 앞에 12지신상의 석수를 만들어서 앞에 배치해 놓은 것이 특징입니다. |
12지신상 모두 머리는 훼손되어 없어졌으며 몸통만 남아있습니다. 상석과 난간석은 후대에 새로 보수 한 것 같습니다만, 12지신상은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며, 비롯 몸통만 남아 있지만 1200년 이상을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재위 701∼737)의 무덤은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 방향 동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송림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성덕왕의 형인 효소왕의 능으로 전해지는 고분이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隆基)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만든 성덕대왕 신종이 보존되어 있다. |
성덕왕릉 귀부는... |
성덕왕릉 정면의 논 한 가운데 비석 받침돌인 귀부 한 기가 있는데, 성덕왕릉 귀부(聖德王陵 龜趺)란 명칭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9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귀부는 조각 조각 깨져 있습니다만, 네 발톱의 날까로운 모습은 그대로 느낄 수 있으며, 부분적이나마 등에 새긴 무늬도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귀부의 머리도 없어지고, 몸통도 여기 저기 깨어져 있지만 귀부 역시 오랜 세월을 지켜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
통일신라 성덕왕의 능 앞에 세웠던 비석의 받침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는 원래는 비몸과 그 위에 머릿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이 받침돌만 남아 있다. 받침의 거북은 목이 부러졌으며, 앞·뒷발에는 발톱을 새겨 놓았다. 등에는 6각형 무늬를 새겼으며, 중앙에 비몸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파여 있다. 거북의 등에 새긴 무늬나 다른 덩굴무늬를 통해 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비록 비몸과 머릿돌이 없어졌으나 왕릉을 만들 때 이용된 거북받침돌의 제작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성덕대왕 신종은... |
경주에 가면 반드시 방문하는 곳이 경주 국립박물관이고 박물관에서도 성덕대왕 신종(국보 29호)은 누구나 보셨을 겁니다. 경주 박물관을 들어서면 박물관 건물 우측에 넓고 큰 종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곳의 종각은 일반 사찰의 종각과는 달리 지붕과 네 기둥만이 있어서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종에 대해서는 설화도 많고 종은 이전하면서 이야기도 많습니다만, 대부분 아시는 내용이라서 생략합니다. |
신라 경덕왕은 부왕인 성덕왕의 위업을 추앙하기 위하여 구리 12만근을 들여 이 대종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뒤를 이어 아들 혜공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혜공왕 7년(771)에 이 종을 완성하고 성덕대왕신종이라 하였다. |
이 종은 처음 봉덕사(奉德寺)에 받들어 달았으므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애틋한 속전(俗傳)이 있어 에밀레종이라고도 불러 왔다. 봉덕사가 폐사된 뒤 영묘사(靈廟寺)로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었다. 1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 구박물관으로 옮겼으며, 박물관이 이곳으로 신축 이전하게 되어 1975년 5월 26일에 이 종각으로 옮겨 달았다. |
종의 입둘레는 팔능형(八稜形)이고 종머리에는 용머리와 음관이 있다. 특히 음관은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서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한다고 한다. 종 몸체 상하에는 견대(肩帶)와 구대(口帶)가 있고 견대 밑 네 곳에 유곽(乳廓)이 있고 유곽 안에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몸체의 좌우에는 이 신종의 내력을 적은 양주(陽鑄) 명문이 있으며 앞뒤에는 두 개의 당좌(撞座)가 있고, 유곽 밑 네 곳에는 구름을 타고 연화좌(蓮華座)에 앉아 향로를 받는 공양천인상(供養天人像)이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
산과 같이 크고 우람하나 조화와 균형이 알맞고 종소리 또한 맑고 거룩하여 그 긴 여운은 은은하게 영원으로 이어진다.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25∼11cm,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
성덕왕릉 위치도 |
성덕왕릉은 ↓ 화살표 아래에(귀부는 성덕왕릉 바로 아래 있음)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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