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흥왕릉(사적 177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진지왕릉 바로 우측에 쌍릉처럼 있는 봉분이 진흥왕릉이며, 진지왕릉 보다는 지형적으로 한 단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한 곳에 밀집해 있는 4기의 왕릉을 돌아 보면서 다른 왕릉은 몰라도 맨 마지막에 있는 진흥왕릉은 다른 3기의 왕릉에 비해서 크고 멋질줄 알았더니 4기의 왕릉이 거의 쌍둥이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곳에 있는 4기의 왕릉을 발굴하거나 지석이 발견되지 않은 한 누구의 왕릉이라고 확정적으로 단언은 할 수 없으나 그 유명한 진흥왕의 능이 봉분도 작고 아무런 부속물도 없이 초라함에 대해서 과연 이 능이 진흥왕릉일까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
▲ 진흥왕릉 우측 전경 |
▲ 진흥왕릉 뒤편에서 내려 다 본 모습 |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무덤이다. 진흥왕은 본명이 삼맥종(三麥宗)이며, 법흥왕의 아우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로서 왕비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진흥왕은 신라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으로 기록되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할 정도로 불교에 의지하였다.
진흥왕은 지증왕의 손자로서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빼앗아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고,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여 신라 역사상 최대 영토를 차지한 왕으로 점령지에 척경비를 세웠다.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신라 최대의 절인 황룡사를 세웠다. 또한 삼국통일의 중추세력인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76년 8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진흥왕릉은 법흥왕릉과 함께 애공사 북봉에 있었다는 것인데, 현재 전하고 있는 법흥왕릉과 진흥왕릉은 선도산을 사이에 두고 정반대편에 2㎞ 이상 떨어져 있어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능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삼국시대 신라 왕릉으로서는 규모도 너무 작은 편이다. 따라서 진흥왕릉은 이 능이 아니라 무열왕릉 뒤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위에서 두 번째 고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높이 5.8m, 지름 20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된 이 무덤은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
4기의 왕릉(문성/헌안/진지/진흥 왕릉) 위치도 |
화살표 방향 맨 위에 ↑ 4기의 왕릉(문성/헌안/진지/진흥)이 있음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92-2 |
'여행이야기(왕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 경애왕릉 (0) | 2012.12.27 |
---|---|
[스크랩] [15] 신라 무열왕릉 (0) | 2012.12.27 |
[스크랩] [10] 김유신 묘 (0) | 2012.12.27 |
[스크랩] [09] 경주 괘릉 (0) | 2012.12.27 |
[스크랩] [08] 경주 구정리 방형분 (0) | 2012.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