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05] 신라 경순왕릉

장안봉(微山) 2012. 12. 27. 21:23

신라 경순왕릉(사적 244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을 벗어난 신라 왕릉이며, 그 것도 경주에서 천리가 넘는 경기도 연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경순왕릉하면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나마 고려에서 왕의 예우로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하니 망국의 왕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 경순왕릉 입구 원경

▲ 입구 우측의 어느 종중 묘단(?)

▲ 경순왕릉 입구 전경

수도권 거주자는 경주에 있는 신라 왕릉 몇 곳만 둘러 보러 가더라도 최소 1박 2일은 가져야 합니다. 대신에 경순왕릉은 수도권에 있어서 가기가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경순왕릉 역시, 가기가 쉽지 않은 지역에 있습니다.

 

경순왕릉이 있는 곳은 아래의 지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남방한계선의 군사지역 안에 있어서 답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만, 2005년 연말부터 경순왕릉을 개방했습니다. 개방 초기에는 일일이 검문 검색을 하고 들여 보냈으나 최근에는 경순왕릉 입구 주변에 펜스를 설치하고 감시 카메라로 대체하여 자유롭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 경순왕릉 원경

▲ 경순왕릉 우측에 위치한 비각과 수복방(?)

경순왕릉 권역으로 들어서면 사방이 철책으로 둘려 있으며, 언덕 위의 초소에서는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능역 입구 우측에는 수복방(재실?) 같은 맞배지붕의 건물이 한 채 있는데 1986년에 지었다고 하며, 그 앞으로 비각이 있습니다.

 

비각 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는 작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는 6. 25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 도로변에 방치되 오던 것을 원당리 고랑포 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보호해 오다가 1986년 비각을 새로 건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왔으며,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로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10자 정도가 확인될 뿐이라고 합니다. 이 신도비는 1,000년이 넘은 당시의 비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 경순왕릉 전경

▲ 경순왕릉

능역 아래는 넓은 사초지가 있으며, 작은 언덕 위에 경순왕릉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능역을 오르면 좌우로 망주석과 석양 한 쌍이, 중앙에는 망주석이 서 있습니다. 그나마 있는 석물인 석양은 앞 뒤로 여러 곳 깨져 있으며, 이 곳에 있는 능비와 석물들은 임진왜란 이후 1700년대 후반에 다시 왕릉의 위치를 찾으면서 조성된 석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신라 왕릉하면 큰 봉분이 연상됩니다만, 이 곳 경순왕릉은 조선조 왕릉의 봉분보다도 상당히 작습니다. 봉분 아래는 호석을 둘러 놓았으며, 바로 앞에 작은 능비에는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뒷면에는 5행으로 경순왕의 간략한 생애를 기술한 87자가 음기되어 있습니다.

▲ 석양과 망주석

▲ 석양

▲ 장명등

경향신문에 게재된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기사(2007.03.02)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면...

 

"임진애란의 와중에서 능의 존재가 실전(失傳)됐다가 조선 영조 때 후손에 의해 겨우 되살아났다. 이후 왕릉급의 대우를 받아오다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다시 존재를 잃어갔다. 일제가 향사(享祀)제도를 폐지한 탓이었다. 그리고 8·15해방과 분단,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똘똘한’ 군인 덕에 극적으로 부활한다. 1973년 1월 육군 25사단 관할 중대장이던 여길도 대위는 무덤 주위에서 총탄에 맞은 명문비석을 확인하고는 무릎을 친다. 바로 ‘신라경순왕의 무덤’이었던 것이다. 여대위는 즉각 상부에 보고했고, 이 소식은 경주 김씨 대종회로 통보됐다. 두번씩이나 사라졌던 ‘신라 마지막 임금’이 국가사적(1976년 지정)으로 환생한 것이다. - 중략 -

 

김용석 경주김씨계보연구회 연구실장에 따르면 김알지를 시조로 모시는 신라 김씨의 분파가 450여개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약 90%가 경순왕의 후손이란다. - 중략 -

 

“신의 선조인 경순왕의 능묘를 오래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장단에서 그 지석 및 신도비가 나왔으니….”(조선왕조실록) 1746년 10월14일이었다. 경순왕의 후손인 김응호가 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 실전(失傳)된 조상의 무덤을 찾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비지(碑誌)의 인본(印本)을 확인해보니 경순왕릉이 틀림없다”면서 다시 무덤을 조성했다.

그런데 왜 경순왕은 경주가 아니라 고랑포구가 눈 앞에 보이는 야트마한 산에 묻혔을까. 속전인 계림문헌록을 보자. “왕의 훙거소식(978년 4월4일)을 듣고 신라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뤄 경주로 능지를 잡았다. 유거민들 전원이 등에 양식과 침구일체를 지고 다 따라 나서자 송도가 텅빌 정도였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긴급군신회의를 연 뒤 구실을 찾는다. “왕의 운구는 100리를 넘지 못한다(王柩不車百里外).”

고려로서는 참으로 ‘절묘한 구실’을 찾은 것이다. ‘왕의 대우’를 보장하는 대가로 운구의 임진강 도하를 막은 것이다. 왕의 장례를 옛 신라 도읍인 경주에서 치를 경우 그곳 민심의 향배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하나 지금은 남방한계선과 불과 50여m 떨어진 궁벽한 곳이지만 지금의 잣대로 경순왕릉과, 그 코앞에 있는 고랑포 포구를 평가하면 안된다.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지막 포구였던 고랑포는 뭍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집산지였다. 일제 때 화신백화점 분점이 이곳에 있었을 정도다. 고려초에도 고랑포의 위상은 대단했을 것이다. 왕건이 항복한 경순왕을 맞이한 곳이 바로 고랑포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경순)왕이 백관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했다.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이 30여리를 이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두른 듯했다. 태조가 교외에 나가 위로하고….”

30여리에 달하는 그 대규모 인원이 임진강을 도하해서 개경까지 가려면 이곳 밖에는 통로가 없었다. 또하나 전설에 따르면 향수병에 걸린 경순왕이 고향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이름붙은 도라산(都羅山)이 이곳과 멀지 않다. 경순왕은 고향땅을 향해 건너는 황포돛배를 바라보며, 지금도 향수를 달래고 있을 터이다."

▲ 경순왕릉 후경

▲ 경순왕 신도비 전경

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경순왕의 성은 김(金), 휘(諱)는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 이창(伊滄) 효종(孝宗)의 자이며 모는 헌강왕(憲康王)의 여 계아태후(桂俄太后)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의 재위시기는 나말(羅末) 전란시대로 영토는 왕건과 견훤에게 대부분 빼앗기고 각처에서 군웅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였다.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자 마침내 군신회의를 열고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겨줄 뜻을 표하자 군신들간에 찬반론이 있었으나 결국 시랑 김봉휴에게 국서를 주어 고려 태조에게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겨줄 뜻을 전하게 하였다.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그리고 나서 왕은 신하를 거느리고 서울(慶州)을 떠나 고려 태조가 있는 송악으로 향했다. 태조는 궁동의 갑제일구를 주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로서 그 아내를 삼게 하고 정승공(政丞公)을 봉하여 선일천석(線一千石)을 내리고 시종원장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경주(慶州)라 고쳐 공의 식읍으로 하고 또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였다.

 

공이 고려 경종 3년(978) 4월 4일 별세하자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하고 왕의 예로서 장례를 모시고 능을 조영하였으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조선 영조때에 찾게 되었는데 신라 왕릉 중 경주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 왕릉이다. 능의 시설은 봉분 곡장 능비 장명등 망주석이 있고 봉분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 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경순왕릉 위치도

   경순왕릉은 바로 이 위에 ↑                                      소재지 : 경기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산18-2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30>경순왕릉과 산릉제향

 

신라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권역 벗어나
고려초 도참풍수가 완벽히 적용된 명당

 ◇우백호가 휘감아 돌아 금대(錦帶)를 이루고 있는 경순왕릉. 경주지역을 벗어난 유일한 신라 왕릉으로 고려 초의 도참풍수가 완벽히 적용된 혈처다.

 

한 국가 지도자나 군 통수권자의 판단과 명령은 무고한 인명의 생사와 직결될 때가 적지 않다. 더구나 그것이 국운을 좌우하고 수많은 백성의 생존 여부와 연관되는 일이라면 더욱 심각해지고 만다. 이처럼 생사를 가르는 절박한 위기 순간에 냉철한 이성으로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 저마다 쉬운 일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반드시 거기에는 후일의 역사적 심판과 평가가 뒤따르게 되어 있다.

 

서기 935년 신라 마지막 임금 제56대 경순왕(897∼978)이 나라를 고려에 넘겨준 사건을 놓고 지금까지도 이론이 분분하다. 사학계에서조차 평가가 엇갈려 있다. ▲임금의 자리에서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어떻게 천년사직을 고스란히 넘겨줄 수가 있느냐는 문책론을 내세워 패국군주(敗國君主)로 못박는가 하면 ▲이미 국운이 쇠락하여 대항해 보았자 승산 없는 싸움인데 아까운 군졸과 백성들을 잃지 않고 항복하길 잘했다는 시각도 만만찮다.

 

◇능의 기단인 당판 아래 도툼하게 올라온 전순(前脣). 왕릉 앞에는 조영된 것이 많으나 자연이 빚어 놓은 전순은 대단한 길격이다.

 

이에 대한 경주김씨(경순왕 후손) 후예들의 의견은 한결같다. ▲무심한 일부 사학자들이나 세인들은 ‘항복’이라고 표현하나 그것은 결코 항복이 아니고 반드시 손국(遜國) 또는 양국(讓國)으로 불러야 하며 ▲군왕의 권위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민생을 염려하여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난 높은 뜻을 올바로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경순왕은 927년 경주 포석정에서 여흥을 즐기고 있던 55대 경애왕이 견훤군 습격으로 시해된 뒤 왕위에 오른다. 우리 한반도 역사 중 유일한 전국시대였던 당시 상황은 이미 ‘신라의 때’는 아니었다. 지방 호족의 창궐로 영토 대부분을 상실한 상태였고, 왕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으로 기강이 무너져 왕명조차 짓밟히기 일쑤였다.

 

이런 풍전등화의 내우외환 속에서 경순왕은 장남 마의태자를 비롯한 일부 신하들의 극력 반대를 무릅쓰고 자진 망국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왕위에 앉힌 견훤을 마다하고 도량이 후덕한 왕건에게 나라를 넘겼다. 경순왕이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에 뻗쳤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왕건은 경순왕 김부(金傅)를 태자위에 해당하는 정승공에 봉했고 경주를 식읍으로 내주었다. 김부의 원장(員將)들을 모두 채용해 고려에 귀속시키는가 하면 큰딸 낙랑공주와 혼인토록 하여 부마로 삼았다. 그 후 경순왕은 신라가 망한 뒤로도 43년을 더 살다가 고려 제5대 경종 3년(978) 4월4일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신라를 통치했던 당시 왕들의 능은 모두가 경주 권역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경순왕릉은 경주 밖에 있다. 민통선 인근인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1번지. 곳곳의 높다란 철조망과 함께 지뢰밭임을 알리는 빨간 표식이 분단국의 비애를 여지없이 실감케 한다. 이곳 고랑포는 1968년 1·21사태 때 북한군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택했던 침투로였고 능 뒤가 남방한계선이다. 노구를 이끌고 취재에 동행해 준 한국풍수지리중앙회 거봉 김혁규 회장과 임원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단출한 능 앞의 석물들. 곡장(曲墻)과 함께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고려 왕실의 따뜻한 배려로 천년 길지를 잡아 안장한 덕택일까. 능역에 들어서니 마치 어머니의 치마폭에 안긴 듯이 안온하고 푸근하다.

 

“기록에는 계좌(북에서 동으로 15도) 정향(남에서 서로 15도)으로 나타나 있는데 현재 상석이 놓인 방향은 축좌(북에서 동으로 30도) 미향(남에서 서로 30도)입니다. 후일 능을 사초하면서 달라졌을 수도 있으니까 이럴 때는 계좌 정향으로 봐야지요.”

 

거봉의 설명에 박동일(72·연천향교 전장) 경순왕릉 문화해설사도 동감한다. 15도의 차이지만 득수와 파구가 달라져 후손들에게 미치는 발복 여부는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하관할 때 적용하는 재혈과 분금에서는 더욱 정교함을 요하는 것이 풍수라는 학문이다.

 

“간향(艮向·동에서 북으로 45도) 입수룡(入首龍)에 을득수(乙得水) 미파구(未破口)니 길격을 갖춘 영화지지입니다. 특히 백호가 전순(前脣·묘 앞의 입술처럼 두드러진 둔덕)을 환포하며 수구(水口)까지 막아 주고 그 뒤를 임진강이 휘감아 돌았어요. 저 국세가 바로 금대(錦帶)입니다. 장손보다는 지손과 함께 외손의 발복이 두드러졌을 겁니다.”

 

왼쪽 청룡 방향의 파수(破水)가 월견수(어깨너머로 비치는 물)나 당문파(묘 앞에서 직사로 빠져 나가는 물)가 아니어서 지기 영향도 오래갈 것이란 국세 풀이다.

문득 도선국사 이전의 풍수형태는 어떠했을지 궁금해졌다.

 

◇산릉제향 시 필요한 제기와 제복을 보관해 두는 재실. (왼쪽)◇경순왕릉 비각.

 

“우리나라에 풍수가 전래되기 전에는 ‘밀교법(密敎法)’으로 산을 판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흙을 파서 색깔을 본다거나 맛을 보고 가늠해 내기도 했어요. 때로는 계란을 묻어 두었다가 곯지 않으면 좋은 땅으로 알고 묘를 썼고, 유불선 삼교에서는 기(氣)를 찾아 음택과 양택을 구분해 내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사례는 고대 왕릉의 조성 양태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경주 인근의 신라 왕릉 상당수가 황토에 평지분으로 용사되어 있음도 무관치 않다.

 

경순왕릉은 임진왜란 이후 오랜 세월 실전되었다가 영조 24년(1748) ‘敬順大王藏地(경순대왕장지)’라는 지석(誌石·장사 지낼 때 함께 묻는 표지석)과 함께 영역을 찾아내 새로 조영한 것이다. 원형의 봉분 하단에 둘레석을 돌렸고 상석, 장명등, 표석, 석양 1쌍, 망주석 2기가 배치돼 있는데 대부분 조선 후기 양식이다. 1975년 문화재 사적 제244호로 지정하여 국가가 보호하고 있다.

 

능 왼쪽 아래에는 백옥비석이 비각 안에 있다. 세월의 풍우에 씻겨 비문은 판독할 수 없으나 거대한 백옥이 값을 매길 수 없는 고가라 한다. 능 입구에는 재실(제기와 제복을 보관하는 곳)이 있다. 그러고 보니 20일(음 4월4일)이 경순왕의 제향일이다.

 

시조 묘의 제사나 임금의 능 제향은 기일(忌日)이 아니더라도 후손들이 별도로 날을 정해 모셔도 허물이 아니다. 최근 들어서는 신라나 고려 왕 후손들이 산릉제향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지파별로 추진되고도 있다. 이 같은 전례문화의 복고 현상이 첨단과학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과 무관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조선왕조의 역대 임금과 왕비에 대한 제례인 종묘대제는 유네스코 선정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록(2001년 5월18일)되었고 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를 축소시킨 것이 바로 산릉제향이기 때문이다. 산릉제향 봉행 시 아헌관(두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은 왕비 문중의 대표가 헌작하고 있어 예법을 모르고 있다가 당황하는 경우도 여러 번 보아 왔다.

 

산릉제향은 봉심(奉審)으로부터 시작된다. 제향 1∼2일 전 종손이나 초헌관이 능에 직접 올라 살피는 것으로, 반드시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면서 봉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절차다. 이 봉심례는 사가례(私家禮)에도 그대로 적용돼 제사 지내기 전 반드시 묘를 한 번 둘러보는 것이 합당한 예의다.

 

산릉제향은 15명의 제관이 드리는 임금에 대한 제례이며 ① 초헌관 ② 아헌관 ③ 종헌관 ④ 감제 ⑤ 집례 ⑥ 대축 ⑦ 내봉작 ⑧ 외봉작 ⑨ 좌전작 ⑩ 우전작 ⑪ 봉로 ⑫ 봉향 ⑬ 사준 ⑭ 봉등 ⑮ 찬의로 구성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봉작과 외봉작을, 봉로와 봉향을 한 명이 겸할 수도 있어 13명으로도 가능하다. 제향 수일 전 습의(習儀) 과정을 통해 충분히 예행연습을 하므로 누구에게 임무가 주어져도 감당해 낼 수가 있다.

 

다만 ▲공수법(拱手法·오른손으로 왼손 엄지를 잡고 왼손가락이 오른손 등을 덮어 배꼽에 가볍게 대는 것) ▲보법(步法·두 손을 공수한 채 머리를 조금 숙여 앞사람 발뒤꿈치를 보며 반보로 걷는 것) ▲승강계법(昇降階法·계단을 오를 때는 오른발 먼저 올려 왼발 합치고 내려갈 때는 왼발 먼저 내려 오른발 합치는 것. 이를 연보합보라고도 함) ▲문 출입법(들어갈 때는 동쪽문, 나올 때는 서쪽문, 중문은 신문(神門)이라 하여 축함이나 제수만 출입할 수 있음) ▲부복법(俯伏法·무릎을 꿇고 앉아 양손을 여덟팔 자로 짚고 팔은 편 채 고개는 다소곳이 숙인 자세) 등을 미리 알아두면 능 제향 참반 시 옆사람의 눈치를 안 살펴도 된다.

 

이때 모든 동작은 집례의 창홀(唱笏·제향 순서를 적은 홀기를 부르는 것)이 끝난 뒤 시작하며 절할 때는 반드시 안경을 벗는다. 왕릉은 4배, 왕자나 군의 묘에는 재배한다. 왕의 묘는 산릉(山陵), 왕세자는 원소(園所), 일반 묘는 산소(山所)라 불러왔다.

 

임진북 예성남정맥의 대맥인 성거산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흘러내리며 명혈지지를 작국(作局)해 놓았다는 경순왕릉.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77년이 지났건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비각 안의 백옥비석. 풍우에 마모돼 판독할 수 없다.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

출처 : 한국의 능원묘
글쓴이 : 광나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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