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순왕릉(사적 244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을 벗어난 신라 왕릉이며, 그 것도 경주에서 천리가 넘는 경기도 연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경순왕릉하면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나마 고려에서 왕의 예우로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하니 망국의 왕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
▲ 경순왕릉 입구 원경 |
▲ 입구 우측의 어느 종중 묘단(?) |
▲ 경순왕릉 입구 전경 |
수도권 거주자는 경주에 있는 신라 왕릉 몇 곳만 둘러 보러 가더라도 최소 1박 2일은 가져야 합니다. 대신에 경순왕릉은 수도권에 있어서 가기가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경순왕릉 역시, 가기가 쉽지 않은 지역에 있습니다.
경순왕릉이 있는 곳은 아래의 지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남방한계선의 군사지역 안에 있어서 답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만, 2005년 연말부터 경순왕릉을 개방했습니다. 개방 초기에는 일일이 검문 검색을 하고 들여 보냈으나 최근에는 경순왕릉 입구 주변에 펜스를 설치하고 감시 카메라로 대체하여 자유롭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
▲ 경순왕릉 원경 |
▲ 경순왕릉 우측에 위치한 비각과 수복방(?) |
경순왕릉 권역으로 들어서면 사방이 철책으로 둘려 있으며, 언덕 위의 초소에서는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능역 입구 우측에는 수복방(재실?) 같은 맞배지붕의 건물이 한 채 있는데 1986년에 지었다고 하며, 그 앞으로 비각이 있습니다.
비각 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는 작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는 6. 25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 도로변에 방치되 오던 것을 원당리 고랑포 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보호해 오다가 1986년 비각을 새로 건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왔으며,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로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10자 정도가 확인될 뿐이라고 합니다. 이 신도비는 1,000년이 넘은 당시의 비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
▲ 경순왕릉 전경 |
▲ 경순왕릉 |
능역 아래는 넓은 사초지가 있으며, 작은 언덕 위에 경순왕릉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능역을 오르면 좌우로 망주석과 석양 한 쌍이, 중앙에는 망주석이 서 있습니다. 그나마 있는 석물인 석양은 앞 뒤로 여러 곳 깨져 있으며, 이 곳에 있는 능비와 석물들은 임진왜란 이후 1700년대 후반에 다시 왕릉의 위치를 찾으면서 조성된 석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신라 왕릉하면 큰 봉분이 연상됩니다만, 이 곳 경순왕릉은 조선조 왕릉의 봉분보다도 상당히 작습니다. 봉분 아래는 호석을 둘러 놓았으며, 바로 앞에 작은 능비에는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뒷면에는 5행으로 경순왕의 간략한 생애를 기술한 87자가 음기되어 있습니다. |
▲ 석양과 망주석 |
▲ 석양 |
▲ 장명등 |
경향신문에 게재된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기사(2007.03.02)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면...
"임진애란의 와중에서 능의 존재가 실전(失傳)됐다가 조선 영조 때 후손에 의해 겨우 되살아났다. 이후 왕릉급의 대우를 받아오다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다시 존재를 잃어갔다. 일제가 향사(享祀)제도를 폐지한 탓이었다. 그리고 8·15해방과 분단,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김용석 경주김씨계보연구회 연구실장에 따르면 김알지를 시조로 모시는 신라 김씨의 분파가 450여개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약 90%가 경순왕의 후손이란다. - 중략 - “신의 선조인 경순왕의 능묘를 오래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장단에서 그 지석 및 신도비가 나왔으니….”(조선왕조실록) 1746년 10월14일이었다. 경순왕의 후손인 김응호가 상소를 올렸다. 임진왜란 이후 실전(失傳)된 조상의 무덤을 찾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비지(碑誌)의 인본(印本)을 확인해보니 경순왕릉이 틀림없다”면서 다시 무덤을 조성했다. 그런데 왜 경순왕은 경주가 아니라 고랑포구가 눈 앞에 보이는 야트마한 산에 묻혔을까. 속전인 계림문헌록을 보자. “왕의 훙거소식(978년 4월4일)을 듣고 신라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뤄 경주로 능지를 잡았다. 유거민들 전원이 등에 양식과 침구일체를 지고 다 따라 나서자 송도가 텅빌 정도였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긴급군신회의를 연 뒤 구실을 찾는다. “왕의 운구는 100리를 넘지 못한다(王柩不車百里外).” 고려로서는 참으로 ‘절묘한 구실’을 찾은 것이다. ‘왕의 대우’를 보장하는 대가로 운구의 임진강 도하를 막은 것이다. 왕의 장례를 옛 신라 도읍인 경주에서 치를 경우 그곳 민심의 향배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하나 지금은 남방한계선과 불과 50여m 떨어진 궁벽한 곳이지만 지금의 잣대로 경순왕릉과, 그 코앞에 있는 고랑포 포구를 평가하면 안된다. 임진강 상류로 가는 마지막 포구였던 고랑포는 뭍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집산지였다. 일제 때 화신백화점 분점이 이곳에 있었을 정도다. 고려초에도 고랑포의 위상은 대단했을 것이다. 왕건이 항복한 경순왕을 맞이한 곳이 바로 고랑포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경순)왕이 백관을 이끌고 서울을 출발했다.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이 30여리를 이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두른 듯했다. 태조가 교외에 나가 위로하고….” 30여리에 달하는 그 대규모 인원이 임진강을 도하해서 개경까지 가려면 이곳 밖에는 통로가 없었다. 또하나 전설에 따르면 향수병에 걸린 경순왕이 고향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이름붙은 도라산(都羅山)이 이곳과 멀지 않다. 경순왕은 고향땅을 향해 건너는 황포돛배를 바라보며, 지금도 향수를 달래고 있을 터이다." |
▲ 경순왕릉 후경 |
▲ 경순왕 신도비 전경 |
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경순왕의 성은 김(金), 휘(諱)는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 이창(伊滄) 효종(孝宗)의 자이며 모는 헌강왕(憲康王)의 여 계아태후(桂俄太后)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의 재위시기는 나말(羅末) 전란시대로 영토는 왕건과 견훤에게 대부분 빼앗기고 각처에서 군웅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였다.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자 마침내 군신회의를 열고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겨줄 뜻을 표하자 군신들간에 찬반론이 있었으나 결국 시랑 김봉휴에게 국서를 주어 고려 태조에게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겨줄 뜻을 전하게 하였다.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그리고 나서 왕은 신하를 거느리고 서울(慶州)을 떠나 고려 태조가 있는 송악으로 향했다. 태조는 궁동의 갑제일구를 주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로서 그 아내를 삼게 하고 정승공(政丞公)을 봉하여 선일천석(線一千石)을 내리고 시종원장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경주(慶州)라 고쳐 공의 식읍으로 하고 또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였다.
공이 고려 경종 3년(978) 4월 4일 별세하자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하고 왕의 예로서 장례를 모시고 능을 조영하였으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조선 영조때에 찾게 되었는데 신라 왕릉 중 경주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 왕릉이다. 능의 시설은 봉분 곡장 능비 장명등 망주석이 있고 봉분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 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
신라 경순왕릉 위치도 |
경순왕릉은 바로 이 위에 ↑ 소재지 : 경기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산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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