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91호
공양왕(恭讓王, 1345 ~ 1394년, 재위: 1389 ~ 1392년)은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제20대 국왕인 신종(神宗)의 둘째 아들 양양공의 6대손이며 정원부원군 왕균과 충렬왕의 서장자 강양공 자(滋)의 손녀 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의 차남이다.
휘는 요(瑤)이며, 시호는 폐위되어서 시호가 없이 공양군(恭讓君)으로 불렸다가, 조선 태종이 그를 왕으로 추봉하면서 시호가 올려져 시호는 공양대왕(恭讓大王)이다.
1389년부터 1392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맡았다. 폐위 후 처음에는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으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다시 삼척으로 옮겨진 뒤에 그 곳에서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간성왕(杆城王)이라는 호가 붙여졌다.
왕후는 교하(交河) 사람인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노진의 여식인 순비 노씨이다. 어려서 정창군(定昌君)에 봉해졌고, 그의 형 정양군 왕우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하여 사돈인 관계로 이성계 일파의 추대를 받아 폐가입진(廢假入眞)이라는 명분으로 왕위 계승자로 천거되었다.
친명(親明)의 이성계와 그 일당이 1389년(창왕 1년)에 창왕을 폐위시킨 직후에 그를 옹립하였다. 정몽주(鄭夢周) 등의 고려의 충신들은 국왕을 보필하며 고려를 재건하려는 필사의 노력을 하였으나, 이성계의 5남인 태종 이방원(李芳遠)에게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육당하자, 고려의 신료들의 응집력이 약화되어 조정은 와해되었다. 그리고 1392년(공양왕 4년) 이성계와 이방원, 정도전(鄭道傳) 등은 공양왕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여, 고려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그리고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봉(降封)되었으며, 7월 11일에 폐위된 공양왕은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8월에 공양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간성으로 쫓겨났다.
공양왕은 강원도 간성에 머무르다가 1394년(태조 3년) 3월 14일에 삼척 궁촌리로 유배지가 옮겨진다. 4월 17일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고돌산의 살해재에서 왕태자 석(奭)과 함께 교살되었다. 1416년 조선 태종은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을 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내었다.
고려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이 담긴 연못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조선 태조에세 왕위를 빼앗기고 도성인 개성에서 도망쳐 이곳 견달산 아래레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워졌다. 두려움과 배고픔으로 지쳐있는 왕의 일행에게 건너편 골짜기에서 한 가닥 불빛이 보여 찾아가 보니, 마침 작은 절이 있어 하룻밤을 묵고자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미 불교의 나라 고려는 멸망되고, 새로운 유교의 나라 조선이 창건되었으니, 절에서 머물기는 어렵게 되었고 인근의 대궐고개 다락골 누각에 피신하게 되었다. 이후 남몰래 스님들이 밥을 날라 왕에게 드렸는데 이러한 이유로 이 마을의 이름이 밥 절 즉, 식사동(食寺洞)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왕과 왕비가 보이지 않아 스님들과 왕씨 일행이 온 산을 뒤지며 왕을 찾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다만 공양왕과 왕비가 귀여워하던 삽살개만이 골짜기의 작은 연못 속을 향해 계속 짖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이상히 혀겨 연못을 자세히 보니, 사람의 형상이 보였고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자 그 안에 왕과 왕비가 편안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두 분의 시신을 정성들여 모셔 연못 뒤 양지바른 곳에 자례를 치루고 능을 지키기 위해 능 앞에 삽살개 모양의 석물을 세워 지키게 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설로 인해 인근에 식사동 뿐만 아니라 어침이, 대궐고개, 왕릉골 등 여러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려사나 왕조실록과 같은 정서에는 공양왕이 강원도 삼척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고양 사람들의 공양왕에 대한 애절함이 이와 같은 전설을 만든것으로 보인다. 이에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을 길이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고양시에서 공양왕릉 정비사업을 하면서 연못을 좀 더 깊고 넓게 보수하게 되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 1389~1392 재위)과 왕비 순비(順妃)의 능이다.
공양왕은 재위 4년만에 고려가 망하면서 폐위되어, 원주(原州)에 추방되어 공양군(恭讓君)으로 봉(封)하여졌고, 삼척(三陟)에 옮겨져 그곳에서 태조(太祖) 3년(1394) 춘추(春秋)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태종(太宗) 16년(1416) 공양왕으로 추봉되어 봉릉(封陵)이라 하였다. 능은 왕과 왕비의 쌍릉형식으로 되었고, 능앞의 석물로는 비석 1좌씩과 석상(石床)이 놓였고, 장명등(長明燈)이 1좌, 양쪽에 석인이 2쌍, 석호(石虎) 1필이 있다. 비석은 봉릉 당초의 것으로 보이는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비가 서 있다.
공양왕릉은 삼척과 고양의 2개의 능으로 전해오고 있다. 아직 삼척의 공양왕릉은 답사하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아마도 삼척의 공양왕릉은 강화도의 4개의 고려 왕릉과는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것 같고, 이곳 고양의 공양왕릉은 강화도의 4개 왕릉과는 다른 모습이고 기존 조선 왕릉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위키백과에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공양왕의 능은 강원도 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두 곳에 있다. 삼척 묘는 처음 묻힌 곳이고, 고양에 위치한 묘는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에 묻은 곳으로 추정된다.' 삼척에 있는 능은 기존 왕릉과 비슷하고, 고양에 있는 능은 조선 왕실에서 만든 것으로 다를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아마 삼척의 있는 능을 답사하면 알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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