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출신 풍수사 목효지의 생애(?-1455)
목효지(睦孝智)의 출신에 대해서는 전농시 소속의 노비로 한 눈이 먼 것만 알려졌다.
목씨는 사천을 본관으로 하는 단일 성씨로서 고려말부터 중앙정계 진출이 두드려 명문 세가를 이룬다.
특히 재신 목신우의 아들 목인해(睦仁海)같은 이는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기여를 한다.
그러나 태종 임금 때 역모사건에 걸려 자신과 자식들이 처형되기도 한다.
목효지는 목인해의 일족으로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부모가 노비로 몰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이다.
이와 같은 추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로서 젊은 목효지가 세종 23년에
올린 상소문을 보면 한문에 능했으며 그를 바탕으로 여러 풍수서적들을 읽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태어나서부터 노비였다면 한문을 익힐 여유가 없었을 것이고 더구나 당시에 구하기 힘든 풍수서적을
다양하게 읽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목효지가 처음부터 노비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문종과 단종 때 그는 나름대로
권력다툼에 줄을 대려다 세조의 미움을 받아 세조가 즉위하자마자 세조에 저항하였던 다른 대신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한 사실이다.
지관으로서 왕릉선정에 잘못하였다는 이유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처형 원인을 밝히라는
사헌부 장령 이승소의 상소에 다른 '무인들과 마찬가지'였다는 애매한 답변이 있을 뿐이었다.
단순한 노비였다면 이와 같은 단종과 세조 사이의 권력 쟁탈전에 도박을 걸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노비 목효지는 운이 없었던지 세종 23년 임금에 의해 전농시 노비에서 풀려나 풍수학으로 잠깐 말단
벼슬을 하는 행운을 누렸으나 다시금 세종의 노여움을 사 세종 30년 다시 전농시 노비가 되었다가
세조가 즉위하자마자 처형당하고 만다.
소릉(昭陵) 논쟁
1441년 세종23년 세자(훗날 문종)의 부인 권씨가 아들을 낳고 3일 만에 죽는다.
이때 태어난 왕자가 단종이다.
훗날 부왕 문종의 뒤를 이어 어린 왕자가 임금이 되었지만 왕위를 숙부에게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원인 가운에 하나는 단종의 어머니가 자신을 낳자마자 죽었다는데 있었다.
대개 임금이 성년이 안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 궁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여 임금을 보좌하는데 단종이 즉위하였을 때에는 수렴청정을 해줄만한 대비나
왕비가 없어 권력을 제대로 장악할 수 없었다.
단종의 어머니이자 문종 세자의 부인(세자빈)이었던 권씨가 죽자 안산 고읍(古邑)에 장지를 정한다.
이때 이곳을 소점한 지관은 최양선이었다.
그러나 전농시 소속의 노비가 임금에게 올린 한 장의 글은 이 결정을 번복시킨다.
젊은 노비 목효지가 다음과 같은 상언을 올리고서이다.
“무릇 상지법은 조종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오니, 조산이 높고 준수한 연후에야 생기가 왕성하고,
생기가 왕성한 연후에야 음덕을 내리는 것이 연면(連綿)하게 멀리 가는 것입니다.
대개 산천의 영령한 기는 제 스스로 행하지 못하고 산을 따라서 운행합니다.
잘 결합되어 판국이 된 것은 반드시 내룡(來龍)이 있어서 높이 솟고, 청룡과 백호가 둘러싸고
조회(朝會)해 보이는 안산이 분명합니다.
주변 산들이 공읍하고 수맥이 굴곡하여, 물이 깊고 맑으며 휘돌아 굽이쳐 흐르되, 오는 데에
그 근원이 안 보이고 가는 데에 그 흐르는 곳이 안 보여서, 마땅히 들어올 때에 들어오고 마땅히
나갈 때에 나간다면, 좋은 땅이라 하겠습니다.
만약 조종이 얕고 연약하며, 내룡이 미소하여 끊어진 데도 있고 파인 데도 있어서 기맥이 연속되지
아니하고, 산과 물이 서로 등지고 나가서 산란하여 돌아간 데가 없고, 흐르는 길이 곧게 나서 마땅히
들어갈 때에 나가고, 마땅히 나갈 때에 들어오면, 흉지라고 말 할 것입니다.
이제 빈궁의 능소인 안산 옛 읍 땅을 보니, 그 산의 내룡이 얕고 약하며, 길로 끊어진 곳이 많아서
10여 군데나 됩니다. [동림조담]에‘내룡이 악하고 약하면 낳은 아이가 녹아버린다’하였고,
[곤감가]에‘끊어진 산에 가로 파였으면 기가 이어지기 어렵다’하였고, [지리신서]에‘도로가 가로 파인 것은
기맥을 끊어지게 하는 것이라’하였고, 또 [신서]에 이전이 말하기를, ‘만리장성을 쌓느라고 산을 끊어서
진나라가 망하였고, 기수와 변수를 뚫느라고 지맥을 끊어서 수나라가 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크고 작은 것은 비록 다르나 이치는 하나입니다. 또 건해산(乾亥山)이 변하여 계좌정향(癸坐丁向)이 되었고,
사지(巳地)에 수파(水破)되고 계산(癸山)이 토(土)에 속하여, 이미 태(胎)가 끊어졌사오니 진실로 가소롭습니다.
비록 흙을 모아서 그 장생(長生)이라는 말은 면하겠으나, 반드시 적지 않은 해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산은 건해(乾亥)방이 주장이 되었고, 사방(巳方)이 수파(水破)가 되었는데, 건해방은 금(金)에 속하여
사방에 나오니, 이것이 장생이라는 것입니다.
[의룡경]에‘생왕방(生旺方)을 유파(流破)하면 모두 절멸한다’하였고, [호수경]에‘주산(主山)이 감방(坎方)에
있다가 계축(癸丑)으로 전보(轉步)해서 머리를 숙여 간방(艮方)이 되었고, 수행(水行)은 더욱 앞으로 나오고
산행(山行)은 더욱 뒤져서, 먼저 목기(木氣)를 받고 다음에 토기(土氣)를 받아, 그제야 수기(水氣)를 받으면,
3년에 1보(步)요, 10년에 일세(一世)라’하였습니다.
[동림조담]에‘건산(乾山)의 온 것이 짧아서 산절(山節)로 오는 것이 해(亥)라’하였는데, 이제 속사(俗師)들이
건(乾)방에 앉은 산이 짧은 것을 본 것으로 곧 해산(亥山)이 주장이 되었다 하였고, 다시 건산(乾山)을 가져서
물을 꺾지[折水] 아니하니, 이것이 한 가지 병입니다.
[호수경]에‘의당 나아가야 할 것이 들어오면 괴려(乖戾)의 모임이요, 의당 들어올 것이 나아가면
상파(傷破)의 실상이라’하였고, 또 이르기를, ‘물의 나가는 것이 보이면 이름하기를 단기(短氣)라’하였고,
또 혈(穴)이 천관(天關)에 있는데,
[지리문정]에 이르기를,‘천관혈은 범하지 못할 것이니, 범하면 사내을 죽이고 어른을 죽인다’하였습니다.
이순풍의 소권 천관혈주에 이르기를,‘천관이라는 것은 물의 근원이라’하였으며, 또 청룡이 물을 띄고서 곧게
달아났는데, 청룡이라는 것은 남자의 위치입니다.
[문정]에 이르기를, ‘좌산(左山)·좌수(左水)가 곧은 것은 어른을 죽인다’하였고,
[낙도가]에 이르기를, ‘동궁이 달려가서 서궁을 지나면, 장자·장손이 일찍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고현(古縣)은 풍수사들이 역시 꺼리는 것입니다.
[동림조담]에 이르기를,‘장터나 고현은 부녀자가 미천하다’하였는데, 그 길흉의 감응은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 같습니다. [장서]의 이른바,‘구리 광산이 무너지면 (그 광산의 쇠로 만든) 종이 울며,
(봄이 되어) 나무꽃이 피면, (방안에 있던) 밤송이에도 싹이 튼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명산론]에 이르기를, ‘주장하는 바의 길흉이 응(應)하기를 영향(影響)과 같다’하였고,
[장서]에 이르기를,‘화와 복이 해[日]를 돌이키지 않는 것으로, 군자는 신이 하는 일을 빼앗아 천명을 고치나니,
[장서]의 법칙은 골짜기에서 부르는 것 같다’하였습니다. 이것으로서 보건대, 바로 그것이 흉악한 땅입니다.”
목효지가 인용한 풍수서적을 열거하면 [동림조담], [곤감가], [지리신서], [의룡경], [호수경], [지리문정],
이순풍의 [소권], [낙도가], [장서], [명산론] 등이다. 단순히 한 젊은 노비가 읽었으리라고 보기 어려운
책들이며 그가 전개한 풍수이론 역시 다른 술사들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목효지가 지적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 왕후의 능 자리의 문제점은 크게 4가지이다.
첫째, 주산에서 혈장으로 이어지는 내룡이 약하고 끊어진 곳이 많아 장차 후손이 없을까 두렵다.
둘째 재혈이 잘못되었다. 목효지는 '건해입수, 계좌 정향에 사(巳)방이 수파로서 사방은 장생에 해당하여
불길하다'고 한 반면 대신들은 '임자입수, 임좌병향으로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본 교수가 고전 강독 [지리신법] 참고)
셋째, 청룡이 물길과 반듯하게 달렸다(山水同去)는 것으로 즉 좌측 산이 혈장을 감싸지 못하였다.
술사들은 청룡은 남자와 관련시켜 해석하는데 청룡이 안 좋으면 아들에게 불행히 생긴다고 해석하는데
목효지 역시 이 점을 지적한다.
네 번째, 폐허가 된 옛 읍터나 장터는 무덤자리로 적당하지 못하다. 이 점 역시 현대풍수에서도 통용되는 부분이다.
세종이 목효지의 글을 읽고 당일로 우의정 신개·풍수학제조 이정녕·예조 판서 민의생·지중추원사 정인지·첨지중추원사
유순도와 도승지 조서강 등에 명하여 며느리의 무덤 자리를 다시 한번 살펴보되 문제점이 드러나면 다른 곳을 찾으라고
명한다.
다음날인 8월 26일 민의생, 조서강, 안평대군 이용 등이 목효지와 다른 지관들을 대동하고 안산의 능 자리를 살핀다.
그 결과를 토대로 8월 27일 세종에게 목효지의 주장이 틀렸다고 보고한다. 그 내용을 사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중략)
목효지의 예언 적중
결국 대신들은 목효지의 주장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했고, 그 과정에서 재혈에 있어서 처음 정했던
임좌병향이 아니라 자좌오향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세종대왕은 목효지의 말은 취할 바가 없으나 그 극진한 마음이 가상하다 하여 목효지가 글을 올린 3일만에
파격적으로 면천을 시켜주며 풍수공부에 전념케 한다.
세종의 이와 같은 파격적 대우를 조정 대신들이 그대로 수긍할 리 없었다. 며칠 후인 9월 2일 장령 김맹헌이
'목효지가 천한 노비로서, 만일 장지의 그른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풍수학이나 예조에 고할 것이지,
마음대로 임금에게 글을 올린 것은 죄가 됨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면천을 해준 것은 옳지 않다'며
목효지를 벌줄 것을 청한다. 이에 세종은 '목효지가 공이 있어서 상을 준 것이 아니라 젊어서 풍수지리를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면천하여 독서하게 한 것 뿐이다'라고 하여 목효지에 관한 더 이상의 논의를 금지시킨다.
결국 대신들과 당시 지관 최양선이 잡았던 자리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묻힌다.
그러나 훗날 목효지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한다. 현덕왕후가 이곳에 묻힌 뒤 아들 단종은 죽임을 당해 절손되었다.
뿐만 아니라 1457년(세조3년) 세조는 안산에 묻힌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쳐 버린다.
흉지였음이 증명된 셈이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나서 중종 때 다시 현덕왕후의 유골은 수습되어 남편인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구리시 동구릉)에 안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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