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세종대왕은 신하 문열공(이계전대감) 묘를 차지했다.

장안봉(微山) 2013. 12. 13. 22:49

 

                               세종대왕, 한산이씨 선조 묘를 차지하다.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 영릉은 한산이씨 문열공  이계전 묘였다. 광주이씨들은 자기 선조인 이인손의 묘라고 주장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그 전말을 규명해 보려한다. 

 

   여기서 잠깐 문열공 이계전에 대해 알고가면, 목은의 손자로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조카인 사육신 백옥헌 이개선생, 아들 파와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하고, 우리가 잘아는 용비어천가의 발문을 지었다. 대제학을 지내고 세조 때는 이조판서 병조 판서를 지냈으며, 김시습의 스승이다.   

 

   세종대왕이 붕(작고)하고, 뒤어 임금에 오른 문종이 또한 일직 붕하자, 어린 단종이 왕에 오르니,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하고, 급기야 단종까지 죽이고, 승승장구 하나 싶었는데, 큰 아들이 죽고, 피부병 고통 속에 지내다가 붕하고 예종이 왕위에 올랐다.  

 

   예종이 왕위에 오르고, 왕실의 이러한 일련의 변고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이는 세종의 묘가 잘 못되어 일어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세종의 영릉을 천장하기로 하였다. 세종은 아버지(태종 이방원)가 잠든 현인릉 옆에 릉을 써달라고 하였다. 서울 강남구 세곡동 현 국정원 위에 있었다.     

 

  정인지 신숙주를 비롯한 대신들과 왕실 지관인 안효례로 구성된 영릉 천장 Task Force Teem은 명당을 찾기에 나섰다. 지금이라면 명을 받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설쳐댔겠으나, 당시 안효례는 천장했다가 왕실의 변고가 계속 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몰살 당할 것이 두려웠다. 어떻게 정하겠는가? 

 

  안효례는 자신이 당대 최고의 지관이라고 하지만 풍수지리에 대한 허구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었나 보다.  조정에서도 영릉을 천장하기로 결정하고도 원래 영릉이 어떤 이유로 그 곳으로 결정되었었는지도 면밀히 검토하여, 부족한 부문을 천장지에서 보완하도록 하였으니 풍수지리에 과학적 사고까지 곁들였다.

 

 처음 T.F.팀은 한양에서 가까운 노고산(연세대 뒷산)으로 복지하였다가, 심사숙고 끝에 나름대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었으니, 새로운 명당을 찾는 것보다, 사대부 중에서 잘 나가는 후손의 선조 묘를 복지(卜地)하는 것이었다.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한양에서 가까운 용인이내 지역에 있는 전직 대신의 묘소들을 스크린(screen)하였다. 여기에 걸린 것이 강금산(剛金山)에 있는 권총(權聰) 부모(父母)의 분묘(墳墓)를  적격지로 선정하였다.

 

 권총의 부모는 누구인가 보자. 권총의 아버지 권규는 양촌 권근선생의 아들이다. 그러니 문열공 이계전의 아버지와는 처남매부간이고, 자신에게는 외삼촌이다. 권총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바로 태종(이방원)의 따님인 경안공주로 문열공의 외숙모시다. 세종대왕에게는 자신의 친누이였다. 이쯤이면 알만하지 않은가? 왜? 그곳으로 정하여야 하는지 ....

 

 그런데, 안효례가 그 곳은 물이 나는 곳이라 쓸 수 없다고 후에가서 주장했다. 실은 당시 권규의 묘를 쓰려고 파니 물이 나온 것은 사실이었다. 햇빛이 비치자 물이 증발하며 무지개가 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길지라고 여기고 묘를 쓴 것이다. 그러나 권총은 그말은 빼놓고 물이 나왔다고만 안효례에게 말한 것이다.

  

이에 정인지(鄭麟趾) 등 대신들은 “강금산(剛金山) 권총(權聰) 부모(父母)의 분묘(墳墓)는 실로 장생 수파(長生水破)가 아니었는데도, 안효례(安孝禮)가 신(臣)과 더불어 함께 이 산을 복지(卜地)하고서 그 흉(凶)한 것을 말하지 않고 있다가, 용인(龍仁)으로 가는 도중에 서야 장생 수파(長生水破)를 말하고 쓸 수가 없다고 하여, 신 등이 즉시 가서 보고자, 예조 판서(禮曹判書) 임원준(任元濬 임사홍의 아버지) 등으로 하여금 지관(地官)을 거느리고 다시 살피게 하니, 조금도 장생 수파(長生水破)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며, 보건대, 안효례(安孝禮)의 이러한 말은 정섭(情涉)이 주무(綢繆)하니, 청컨대 유사(攸司)에 회부하여 국문(鞫問)하게 하라고 예종에게 직언하였다. 

 

예종은 전지(傳旨)하기를, “여러 재상(宰相)들의 말이 옳다. 그러나 만약 안효례를 죄 준다면, 후일에 상지(相地)할 자들이 두려워하여 반드시 그 나쁜 것을 밝혀서 말하지 아니할 것이니, 죄를 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권총은 세종대왕의 누이 아들로 일직이 부모가 작고하여 어릴적에 궁월에서 생활했고 태종이 무척 귀여워하였다. 세종대왕과는 친하였다.

 

T.F.팀은 여주지역까지 넓혀 걸렀다. 한양에서 30리를 넘지 않은 곳에 위치하여야 왕이 행차하는데 어려움이 없는데, 명당을 찾으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발견한 곳이 바로 문열공 산소다. 문열공 산소를 천장지로 정하고 예종에게 아뢰니, 물 스트레스를 받은 예종의 첫일성은 물이 나오는지 가서 파보라고 한다. 묘 주위를 파보았는데 물이 없다고 하자 흔쾌히 문열공 산소로 천장할 것을  허락하고 수고했다며 정인지 신숙주를 비롯한 대신들에게 향연까지 베풀었다. 정인지는 누구였던가? 바로 문열공과 집현전에서 함께 근무하지 않았던가? 산소를 빼았어 상관에게 주다니, 이런 사실을 세종대왕님께서 아셨다면 어찌하셨을가? 

 

그럼, 여기서 왕조실록 번역본을 그대로 옮겨 광주이씨들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제시해 본다.

 

예종 2권, 즉위년(1468 무자 / 명 성화(成化) 4년) 12월 27일(계축) 2번째기사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봉원군(蓬原君) 정창손(鄭昌孫)·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좌의정(左議政) 김질(金礩)과 육조 참판(六曹參判) 이상과 승지(承旨) 등을 불러 보고, 천릉(遷陵)할 땅을 의논하여 정하였다. 또 상지관(相地官) 안효례(安孝禮) 등을 불러서 각각 여흥 성산(驪興城山)의 이계전(李季甸) 분묘(墳墓)와 강금산(剛金山)과 용인(龍仁)의 금령산(金嶺山)의 길흉(吉凶)을 각각 진달(陳達)하게 하고, 이계전(李季甸)의 분묘(墳墓)의 땅으로써 정하였다. 이어서 술자리를 베풀다.

 

이처럼 명백한 영릉 천장에 대한 세세한 과정이 실록에 있다. 

 

이제, 천장절차를 밟는데, 한산이씨 문열공 산소 아래에 광주이씨 이인손의 묘가 있었다.  왕릉 주위에 자리하게 되는 이인손 묘는 오비이락격으로 이장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그러니 이인손 묘는 아닌 밤 중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되었다.

 

당시 이인손의 아들 5형제 이극배 이극감  이극증 이극돈 이극균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5극으로 이름을 날렸다. 

 

  천장을 실행하려는 와중에, 마침 명나라 사신이 오게되었다. 평양관찰사가 평양에서 사신을 영접하는 접빈사였는데, 당시 평양관찰사는 이인손 아들 이극배였다. 이에 예종은 이인손묘를 이장하는데 아들 (극배)이 참석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며 천장 날자를 이극배가 와서 볼 수있는 날로 정하도록 하였다. 5극의 위세는 당시 대단하였다.

 

이로서, 문열공이 잠들던 산소를 세종대왕이 빼았은 결과가 되었다. 아끼던 신하의 유택을,  본의는 아니라 하지만 대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아뭍은 그 후로 100년간 왕실은 조용하였다. 

 

이인손의 묘가 이장되고부터 광주이씨는 30년간 급제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며, 급기야는 이인손 아들인 이극돈(李克墩,1435년 ~ 1503년 2월 27일)은 무호사화를 일키는 장본이 되었고 그도 처형당했다. 이극돈은 김일손이 장원급제하게 됨을 알고는 시험관에게 장원급제를 극구 반대하여 2등에 머물게 하는 등 사이가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이번에는 김일손이 이극돈이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부정을 저지른 것을 상소하여  둘 사이는 더욱 견원지간으로 되어갔다. 이극돈은 초기에 한명회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며 1498년(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청 당상관으로 성종실록을 편찬하며 사초를 정리하다가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 (弔意帝文)과 훈구파의 비위사실을 기록한 것을 발견하고는 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고했으나 효과가 없자, 이를 공론화시켜서 문제를 일으켰다. 바로 김종직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유자광(柳子光)에게 이를 알렸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저서들도 구하여 조의제문 사본을 의금부와 형조의 형관들에게 제출하고, 원본에 해석과 주석을 달아 연산군에게 전달하면서 사태가 확대된다. 이 사건이 무오사화이다. 연산군이 퇴출될시 이극돈은 임사홍과 함께 비참한 참화를 당하였다.  

 

 광주이씨들은 세종대왕 영릉이 자기 선조인 이인손의 묘라고 말하니, 일반인들도 그렇게 알고있다. 그들이 워낙 확고하게 말하는지라, 왕조실록을 직접확인해 보니 소상하고도 명백하게 광주이씨 이인손의 묘가 아니라 한산이씨 이계전의 묘로 기술하고 있어 광주이씨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에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재미있는 것은, 영릉자리를 두고 여러 설이 있다. 그 쪽 동네 이름에 연주리(延注里)가 있었는데, 이인손 묘를 이장할 때 무덤에서 비기가 발견되었는데, 연(鳶)을 띄워 연이 떨어진 곳으로 이장하라고 되었다고 하나,  延자와 鳶자의 동음만으로 지어낸 낭설이다.

 

이인손이 유언으로 자기 묘에 다리를 놓거나 재실을 짖지 말라고 했는데, 이를 지어 천장지를 물색하던 일행이 비를 피하려고 이인손 재실에 있다가 햇빛이 나자 이인손 묘를 보고 천장지로 정하였다고 하는 등,

 

또, 성주이씨 선조 묘라는 등....

 

그렇듯한 근거에서 말하겠지만, 왕릉 역내에 일반인 묘지가 있을 수 없으니 그 근처 일정범위내 묘지들이 모두 이장조치 되었기에 그런 말들이 나오게 되었다고 본다.   

 

출처 : 安 喩 齋
글쓴이 : 安喩齋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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