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왕능)

[스크랩] ★역사추적 의자왕 항복의 충격 보고서★

장안봉(微山) 2013. 12. 1. 01:09

 

 
 (역사추적)

 

신라 오만대군을 맞아 처절히 싸운 백제 계백 장군과 오천 결사대의 투혼을 기리는 황산벌 전투 재현 그것은 기울어가는 백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기나긴 누명과 오역은 시작됐다. 660년 7월 18일 웅진성의 달빛 아래선 거대한 음모가 진행됐다. 1300여년의 세월 진실이 드러났다. 그것은 철저하게 가려졌던 백제멸망과 의자왕 항복에 관한 충격적인 역사 보고서였다.

 

★역사추적 의자왕 항복의 충격 보고서★

식진지명

 

저는 지금 삼국사기 의자왕 편을 보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의자왕은 황음, 삼천궁녀, 망국제왕과 같은 치욕적인 수식어를 항상 달고 다녔던 무도한 임금의 대명사였습니다. 헌데 이런 의자왕이 제위 기간 내내 대단히 정렬적인 대내외 통치활동을 펼쳤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군요. 나당연합군에게 허망하게 항복하면서 백제의 멸망을 보고 말았던 이 의자왕이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고 강력한 왕권강화를 시도했다. 사실 좀 연결이 되지 않는 부분들입니다. 얼마 전 백제의 멸망을 둘러 싼 새로운 사실을 담고 있는 유물이 발굴됐습니다. 자 지금부터 저와 함께 의자왕의 최후를 둘러싼 충격적인 역사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중국낙양 황하의 물줄기가 고대 중국의 문명을 이루었던 곳이다. 고대문명의 중심지였던 낙양에는 수천 년에 역사가 간직된 유물이 발굴돼 세상을 놀라게 한다. 뜻밖의 유물들이 나타나서 고대사 연구에 활력을 불어 넣기도 한다. 얼마 전 이곳에서 백제와 관련된 유물 한 점이 등장했다. 왜 백제 유물이 낙양에 등장했을까? 제작진은 이 유물의 행방을 수소문 해봤다.

 

“백제국 유물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그건 탁본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백제국 유물 들어본 적 있으세요?”

“백제국 들어본 적 없어요.”

“당대의 묘지명이 나왔다는 것도 못 들었어요?”

“당대 묘지명은 아주 많아요.”

“이건 언제 거예요?” / “청나라시대요.”

“그럼 백제국 비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없습니다. 신경을 안 써서… 아마 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이곳엔 도굴성 유물들도 있기 때문에 출처나 향방에 대해서 솔직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수소문 했던 우리는 그 비를 한 중국학자가 사진으로 찍어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제작진은 일단 그 교수를 만나 유물에 향방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는 오랫동안 낙양에서 고대유물을 연구하고 있는 조우쩐화(고고문물연구가) 교수였다. 중국 고대 금석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역사학자다. 조우쩐화 교수는 유물의 탁본을 사진으로 갖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은 두 장으로 된 묘지명이었다. 묘지명은 망자의 무덤에 넣는 금석문이다.

 

 

묘지명의 주인공은 대당좌위위대장군이란 정3품에 고위직은 지낸 사람이었다.

 

조우쩐화 고고문물연구가

“좌위위는 우위위와 더불어 전부 당 왕조의 16위중 하나입니다. 이 16위는 조정의 금위군입니다. 전문적으로 황제와 조정 그리고 수도의 안전을 도모하는 부대의 장수입니다. 황제가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묘지명에 백제와 웅천인이란 글자가 눈에 띠었다. 百濟熊川(백제웅천) 즉 웅진 오늘날의 충남 공주 출신이었다. 어떻게 백제인이 당나라에서 고위직을 지냈을까? 유물은 진품일까? 취재 도움 요청에 조우쩐화 교수는 어딘가에 전화를 해보더니 유물소장 기관이 방송에 공개를 꺼린다고 좀 더 알아보고 나서 다시 연락하게다고 하였다. 왜 백제 웅진 사람이 이곳에 묻힌 것일까?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며칠 후 다행히도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묘지명의 실물을 취재진에게 보여줄 수는 있지만 방송촬영은 안된다고 했다. 현장에서 설득하기로 하고 급히 묘지명이 있는 낙양 2이공대학으로 갔다. 우린 조심스럽게 묘지명을 촬영하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시린후이 낙양 2이공대학 문물연구원

“왜냐하면 지금 아직까지 연구 단계에 있습니다. 아직 공개를 하자 않아서 제 생각에는 찍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묘지명이 창고에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있어서 촬영이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시린후이 낙양 2이공대학 문물연구원

“한국에서 손님이 몇 분 오셨는데 우리 진열실을 보고 싶어 하세요.”

 

 

 

간신히 촬영허락을 받았다. 우리를 안내한 곳은 이 학교의 탁본 전시실이었다. 창고에서 꺼내온 문제의 묘지석이 탁자에 올려지는 중이었다. 사진속의 묘지명이었다. 아직 중국에서도 실물이 공개된 적이 없다. 지석과 덮게인 개석으로 된 묘지명은 둘 다 글자 한자 파손됨이 없었다. 측면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개석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당추문, 지석의 사면엔 십이지상이 마치 종이에 그린 듯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선명하게 새겨진 百濟熊川人. 백제 마치 백제 고대인을 보는 느낌이다. 묘지명은 중국에서는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가장 유행했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대거 매장됐다. 묘지명의 글씨를 정확히 알기 위해 탁본을 떠보았다. 묘지명은 망자와 함께 바로 묻히기 때문에 당대의 기록들이 왜곡되지 않고 담겨 있어 어떤 기록물보다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지석에는 빼어난 필체 문장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문장의 내용은 묘지명 특유의 은유적인 표현들로 돼있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예식진 할아버지 譽多(예다)와 아버지 思善 모두 백제 최고 직위인 좌평을 지낸 유력가문 출신이었고 614년에 태어나서 678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묘지명은 백제 출신 한 장군의 생애를 뛰어 넘는 엄청난 백제사의 비밀을 담고 있었다. 대당 좌위위대장군, 百濟熊川人, 좌평 집안 예식진은 누구인가?

 

지금 보시는 이것이 바로 어렵게 입수한 대장군 예식진 묘지명의 탁본이 되겠습니다. 상당히 정밀하게 만들어졌죠. 원래는 죽은 사람들의 묘지엔 이처럼 묻혀 있었겠죠. 1300여년 만에 불쑥 나타난 인물 예식진. 이 사람은 원래 백제 사람인데 당나라에 의해서 중용이 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처럼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당나라에는 왜 갔던 걸까요. 예식진의 생몰 년대를 보면 서기 614년에 태어나서 672년에 사망했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상당부분 그의 생애가 백제의 멸망 시기와 겹쳐지죠. 그렇다면 백제가 멸망하던 시기를 살펴보면 이 예식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660년 11월 1일 당나라의 동도였던 낙양 응천문에선 특별한 행사가 벌어진다. 당 고종은 이곳에서 소정방이 백제에서 잡아온 전쟁포로들을 접수했다. 포로들은 의자왕와 88명의 왕족 및 고위관료 그리고 일만 이천 여명의 백성들이었다. 백제 최고 벼슬인 좌평집안의 출신인 예식진도 이들 포로 중 한 명이었을까? 그 가능성을 왜의 사신 이키노무라치 하카도코(당체류 중이던 왜의 사신)의 증언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그는 당나라에 머물다가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그의 목격담을 보자. 의자왕과 왕자 13인, 대좌평 사택천복, 국간성 등 37인, 모두 50여인이 조당에 나갔다.1) 왕족 외의 포로들은 백제 최고위직들이었다. 그렇다면 최고위직인 좌평집안의 예식진도 전쟁포로로 이때 당나라에 끌려 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백제 고위층 집안이 예씨가 백제 멸망 때까지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 비는 의자왕 때 좌평을 지낸 사택지적이 인생무상을 한탄하며 세운 비다. 백제는 부여, 사, 진, 해, 협, 목, 국. 백씨 등이 주요 지배층에 성씨였고 당연히 그 성은 역사서나 금석문에 등장한다.

 

이도학 교수

“종전에는 확인되지 않았던 그런 가문의 존재가 이 묘지명을 통해서 처음으로 드러났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좌평을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문의 존재 또 인물들이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의아스럽다고 좀 이상하다고 이런 느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최고 귀족층이면서 역사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예씨 가문의 비밀 이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의문은 흑치상치 묘지명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흑치상지 묘지명은 낙양에서 1920년대에 발견돼 현재 남경박물관에 보관중이다. 흑치상지는 예식진과 같은 시대에 백제 장군으로 좌평 다음 직급인 달솔을 지냈다. 백제 패망 후 당에서 예식진과 비슷한 우무위위대장군은 지냈다. 그런데 흑치상지 묘지명엔 증조부 대부터 집안 내력이 적혀있다.

 

조우쩐화 고고문물연구가

“중국에서 발견된 당 시대의 묘지명은 선조를 설명할 때 보통 그의 증조부부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흑치상지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식진의 묘지명은 그의 선조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식진의 묘지명에 왜 증조는 기록되지 않았을까? 예식진은 웅천 즉 지금의 공주에서 61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략 590년 생 조부는 대략 570년 생 정도가 된다. 조부와 아버지는 무왕 때에 좌평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도학 교수

“예식진 묘지명에 보면 이제 증조부는 기재돼 있지 않고 할아버지 때부터 이제 좌평에 오른 기록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 비춰볼 때 예식진 가문은 할아버지 때 와서 중앙정계에 핵심적인 그런 위치로 부각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판단이 됩니다.”

 

예씨 가문은 600년대에 백제 신흥정치 세력이 셈이다. 가문의 역사가 짧더라도 어딘가 예씨 가문의 흔적이 있지 않을까. 의문의 장군 예식진. 그의 족적을 찾아 예식진 생존 때의 한중일 기록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어디에서도 예식진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신당서 소정방 열전에서 유일하게 또 다른 예씨를 찾을 수 있었다. 소정방은 660년 나?당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소정방 전의 내용 중 의자왕이 항복했던 상황을 기록한 대목에 웅전성에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항복했다’라는 기록2)이 있다.

 

의자왕은 660년 7월 18일 수도 사비가 아닌 웅진성에 항복한다. 그런데 왜 구지 장군 예식과 같이 항복했다고 기록했을까. 의자왕과 같이 항복한 웅진성 장군 예식은 누굴까? 잠깐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항복할 때 같이 항복한 장군 예식, 웅진성 장군 예식, 웅진 사람 예식진, 대대로 좌평을 지낸 웅진귀족집안 예식진과 의자왕과 함께 웅진에서 항복한 웅진성 장군 예식의 관계는......

 

예식진 묘지명을 통해 예식은 예식진과 같은 웅진성의 예씨 집안 장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식은 의자왕과 항복할 때 한 번 등장하고 전혀 보이질 않는다. 1400년 전에 사라진 웅진성 장군 예식과 1400년 만에 홀연히 나타난 웅진 사람 예식진. 가문, 출신지, 직위, 활동기간 등이 너무나 일치한다. 중국시안의 섬서사범대학. 경북대학교에서 당과 한반도 관계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배근홍 교수는 예식장군을 독특하게 해석했다. 예식과 예식진은 같은 집안 이상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섬서사범대학 역사학과 배근홍 교수

“미스(예식)... 뒷발음 식... 미식(예식) 미스진(예식진)... 미식진. 추정컨대 예식은 당나라에 도착한 뒤에 자기 이름을 쓸 때 중간에 변화가 생겨 예식을 한자 예식진으로 바꾼 겁니다. 지금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이 두 사람은 동일인입니다.”

 

 

삼국사기에도 동일인의 이름을 다르게 기록하는 일은 흔히 있다. 용수 또는 용춘, 진순 또는 진춘, 흠춘 또는 흠순.

 

김영관 청계천문화관 관장/백제사 전공

“그 당시에 한자에 어떤 글자를 쓰느냐는 가차(한자음만 빌려 씀)문제가 있기 때문에 음만 같으면 거의 같은 글자를 쓴다고 보고 한자를 더 쓰느냐 덜 쓰느냐는 표기상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동일인물로 보는 게 합당하다고 봅니다.”

 

당의 정3품 대장군 예식진은 패전국 백제의 옛 예식장군이었다. 그러나 예식진 묘지명은 예식진과 예식의 동일인물이라는 차원을 넘는 백제 마지막 날의 충격 보고서였다. 백제의 예식장군은 어떻게 전쟁포로에서 당나라 대장군이 됐을까?

 

1300여년 만에 불쑥 나타난 정3품 대당좌위위대장군 예식진 그가 바로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과 함께 했던 웅진의 예식장군이었습니다.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예식진은 의지왕의 최측근이었던 셈입니다. 헌데 왜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이 아닌 예식이 대장으로 있었던 웅진 그러니까 지금의 공주에서 항복을 했던 것일까요.

 

 

의자왕은 660년 7월 14일 예식 장군과 함께 웅진성에서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의자왕의 친고구려 반당노선은 당나라와의 마찰을 일으켰고 이는 20년에 걸친 신라의 파병외교에 맞물려 마침내 당나라에 침공을 초래한다. 당군은 서해를 가로질러 660년 6월 21일 인천 앞바다 덕물도에 도착했다. 예상치 못했던 나?당연합군에 전격적인 양동작전은 백제의 방어 대책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칠십 평생을 신라와의 전투로 단련된 백전노장 의자왕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문제였다. 나?당연합군은 예측을 뛰어넘은 엄청난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신라군은 이미 백제의 요충지 탄현을 넘어섰다. 삼국시대의 보편적인 전술은 거점성 점령 후 주변을 평정하고 차근차근 진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전투의 기본 틀을 깨버렸다. 목표는 영토가 아니라 백제멸망 중간 방어성을 무시하고 사비도성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전황은 긴박했다. 의자왕은 신라군 없이는 당군이 섣불리 싸우지 않음을 간파하고 결사적으로 돌진해오는 신라군 저지를 위해 계백의 오천결사대를 황산벌로 급파했다. 직진해오는 신라군을 막기 위해선 사비로 가는 길목 황산벌에서 사생결단의 전면전을 벌어야 했다.

 

나종남 교수 육사군사사학과

“소수의 병력을 가졌던 계백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전술은 아마도 성을 하나 택해서 성에 들어가서 수성전을 하면서 장기전을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신라가 택한 전략이 수성전에 응하지 않고 곧바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으로 진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계백으로서도 신라군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벌판인 평야에 나와서 신라군과 결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판단이 됩니다.”

 

 

오천결사대의 중요한 임무는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660년 7월 9일부터 10일까지 황산벌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오만 신라군은 백제 오천 결사대에 철벽방어선에 가로막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오천 결사대의 처절한 투혼은 4전 4승 믿기지 않는 전과를 올렸다. 계백의 오천 결사대는 이틀 동안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수적 열쇠로 우리 역사상 가장 비장한 장면을 남기고 황산벌에 전설이 되었다. 백제군은 사비 남쪽에서 18만 연합군과 최후의 전면전을 벌이지만 정면 승부는 역부족이었다. 일만의 사상자를 내고 패배한다. 신라 군부는 비교할 수 없는 연합군의 전투력이었다. 결국 패전 5일째인 660년 7월 13일 의자왕은 웅진으로 지휘부를 옮긴다. 그날 밤 사비도성은 더 이상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했다.3)

 

전선은 웅진의 2차 방어선으로 이동한다. 대규모 나?당연합군을 방어하기엔 평지인 사비도성보다 험준한 웅진성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의자왕이 웅진성을 2차방어선으로 잡은 또 다른 배경엔 웅진의 유력가문 예씨 집안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묘지명에 등장하는 할아버지 예다와 아버지 사선 그들도 의자왕의 아버지 무왕 때 웅진성을 지키고 있었다. 무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627년(무왕 28년) 군사를 일으켜 군사를 웅진에 주둔했다. 4개월 동안 웅진은 임시 수도였다. 630년에도 무왕은 사비 중건을 위해 웅진성에서 7월까지 머물렀다.4)

 

이문기 교수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예식진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좌평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이 좌평으로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던 시기는 의자왕의 부왕인 무왕시대로 추정을 해볼 수가 있는데 그 무왕시대부터 왕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의지왕은 예씨 귀족에 대한 기대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씨 집안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의자왕이 웅진성을 제2방어 사령부로 삼은 또 다른 요인은 임존성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다. 임존성은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군이 나?당연합군과 3년 동안 싸울 때 마지막까지 버텼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곳의 흑치상지 가문 또한 의자왕의 든든한 엄호세력이었다. 사비의 십팔만 나당군이 웅진성을 공격하면 임존성의 흑치가문이 측면 지원하는 양상으로 전선이 그어진다. 의자왕이 항쟁을 이끌고 갈 자신이 있었던 것은 웅진성이나 임존성 같은 지방군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백제 지방군의 전력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확인시켜 주는 유물이 있다. 백제에 주둔했던 당군 사령관 유인원 기공비다. 마모돼서 희미한 기록에서 백제 부흥군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었다.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

 

노중국 교수 계명대 사학과

“근데 이게 어느 정도 되느냐 복신이나 도침이 부흥군을 일으킬 때 순식간에 3만 여명이 모였다. 또 2백여 성을 곧 회복을 했다. 일부 지방군들이 큰 타격을 입지 않고 여전히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개전 5일 만에 사비도성을 함락한 완벽한 군사작전 그러나 나?당연합군 지휘부는 의자왕을 놓치는 결정적인 전략실패를 했다. 백제는 지역을 5방으로 나누어서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연합군의 사비 직공으로 지방군 전력은 보존됐다. 의자왕의 전략 핵심은 지방군을 활용한 사비 포위전이었다.

 

나?당연합군에게 또 하나의 큰 위협은 18만 군대의 식량이다. 격렬한 전투 중에 사비 도성의 백제군 군량은 불타버렸다. 벼 수확은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 유일한 방법은 신라에서 조달하는 방법이다. 이곳은 백제 진현성이 있었던 곳이다. 신라에서 오는 보급품은 이 진현성을 중심으로 백제 국경의 산성들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도성을 목표로 신속하게 진군해 온 탓으로 산성의 농성중인 백제 병력이 건재했고 이들은 연합군의 보급 통로를 봉쇄하게 된다.

 

서정석 교수 공주대 문화재 보존학과

“실제로 백제가 부흥운동을 일으킬 때 백제 군사가 이 진현성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신라에서 부여에 보급품이 전달되지 않아서 부여에 주둔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가 굶주림에 지친 적이 있습니다. 당나라 군사를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천여 명이 웅진 도를 개통하기 위해서 웅진 동쪽 그러니까 지금의 대전으로 출동했다가 모두 몰사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보급품 전달에 중요한 위치가 이 진현성과 대전 동쪽지역이 되겠습니다.”

 

의자왕이 장기 농성전을 이끌고 있을 때 46세의 예식 장군은 웅진방령 즉 웅진방어사령부의 실질적인 최고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전 5일째인 660년 7월 18일 갑자기 항복하고 만다. 당시 연합군이 웅진을 공격하는 상황도 특별히 없다. 왜 항복했을까?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을 공격한 흔적도 없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복한다. 충분히 항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백제군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왜 항복을 했던 것일까요. 과연 닷새 동안에 웅진성 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예식진 대장군 묘지명에 탁본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占風異域 就日長安’ 이 아리송한 내용이 의자왕과 예식진 장군의 운명을 얄궂게 돌려놓습니다. 서기 660년 7월 18일 운명의 날. 웅진성의 대반전입니다.

 

 

계룡산 자락에 아슬아슬한 비탈에 자리한 고왕암. 의자왕의 명으로 백제 마지막 해에 지은 암자다. 암자의 뒤쪽엔 천연바위로 된 동굴이 있다. 백제 왕자 융이 피신했다 해서 융피굴이라고 부른다. 왜 이곳에 백제 왕자가 숨었던 것일까? 융피굴 전설이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급박했던 상황의 증언이 아닐까.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의자왕이 항복하는 상황에 대해서 ‘의자왕 및 태자 효가 제 성주들과 함께 항복했다’5)라고 기록하고 신라 본기에는 ‘의자왕이 태자 및 웅진방령군을 이끌고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했다’6)고 돼 있다. 그리고 신당서에는 예식이 등장한다.

 

 

신당서보다 먼저 쓰인 구당서는 더 구체적이다. 구당서는 삼국사기보다 2백년 앞선 945년에 편찬됐다. 그런데 당시의 기록을 유심히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왕이 항복하는 장면을 서술하는데 구당서 신당서 모두 의자왕이 주체가 아니고 부하인 예식이 주체로 돼 있었다.

 

노종국 교수

“중요한 사람 특히 왕이면 왕을 제일 앞세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건과 관련되어 가지고는 아주 심화를 자세하게 사실은 쓸 수가 없는 것이죠. Outline만 쓰게 되어 집니다. 이럴 때 왕과 관련된 사람이 왕보다 먼저 나오게 된다하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뭔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 이유가 뭔지를 탐색해야 하는 것이죠.”

 

 

의자왕의 항복기사 바로 뒤 융의 기사를 보자. 태자 융이 주체로 되어서 어색함이 없다. 예식을 주어로 기록한 것이 사관의 실수로 볼 수 없는 증거다. 중국 역사에 김일제란 인물이 있다. 김일제는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에 귀화하여 큰 공을 세웠다. 중국역사에선 이민족이 공을 세우면 항상 김일제에 비교한다. 중화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모범적인 이민족 사례가 바로 김일제다. 그런데 예식진의 묘지명엔 김일제의 공을 어찌 예식진의 공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칭송하고 있다. 이민족의 모범인 김일제보다 더 극찬 받는 예식진. 그의 공적은 무엇이었을까?

 

바이근싱 교수 섬서사범대 사학과

“백제의 유민 중 부여융 그러니깐 백제의 태자가 마지막에 정3품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흑치상지 역시 마지막에 정3품관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헌자료와 후대에 발견된 묘지명 중 당나라에서 공이 컸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정3품인 예식진의 묘지명에는 이런 쪽의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개방국가였던 당나라는 번장들 즉 이민족의 출세가 보장돼 있었다. 외국인이 입당해서 공을 세우면 공적을 세세하게 남긴다. 예식진과 같은 시기에 당에 건너온 백제 출신 흑치상지는 토번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다. 그의 비문엔 당나라에서 세운 공과 관직의 승격과정이 세세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예식진은 공적과 관직의 경력도 없이 좌위위 대장군만 기록돼 있다. 예식진의 공적은 무엇이었을까?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의자왕의 항복 장면을 독특하게 서술했다. ‘웅진성의 수성 대장이 의자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매 왕이 자결을 시도했지만 동맥이 끊이지 않아 당에 포로가 되어 묶이어 가니라’라고......

 

의자왕의 측근이 예식에게 잡혔다. 신채호 선생의 말뜻은 무엇일까?

다시 구당서의 기록을 보자. 의자왕 항복장면 기사에 어떤 암호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이다. ‘기대장예식 우장의자래항(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을 한자 한자 분석해 본다. 총 11자의 글자 중 명확하게 의미가 드러나는 ‘기대장예식’과 ‘의자’를 제외하면 ‘又將來降’ 넉자다. ‘來’는 오다. ‘又’는 또. ‘降’은 항복하다. 그러면 ‘將’만 남는다. 암호의 정체는 ‘將’. 그렇다. 모든 상황은 이 ‘將’이라는 글자에 정확히 담겨 있다. 그 대장 예식이 또 義慈왕을 將에 와서 항복했다. ‘將’은 무슨 뜻일까?

 

노중국 교수

“‘將’자에는 명사로는 ‘장수’라는 뜻도 있고 동사에는 ‘거느리다, 데리고 간다’라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 문장으로 봐서는 ‘將’은 동사로 봐야 됩니다. 그러면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가서 항복을 했다. 이렇게 되는 거죠. 이게 갖는 의미가 뭐냐 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예식장군이 의자왕을 데리고 가다’, ‘왕을 데리고 간다?’ 무슨 뜻일까?

 

이문기 교수

“의자왕을 감금내지 체로를 해서 당에 항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영관 관장

“의자왕을 사로잡아서 소장방에게 와서 항복을 한 것입니다. 결국 예식은 의자왕에게 대해서 반역을 한 것이고 백제에 대해서 반역을 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將’ 데리고 간 것인가? 아니면 체포해 간 것인가?

취재진은 놀라운 결론에 신중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문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중국 역사학자에 분석을 들어보기로 했다.

 

바이근싱 교수

“예식이 그 왕을 데리고... 여기서 데리고는 왕을 사로잡아서 당나라에 투항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將’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전쟁에서 배신입니다.”

 

예식진 묘지명이 ‘장’이라는 글자를 살려냈다. 대당 좌위위 대장군 예식진. 그의 공적은 주군을 배신한 것이었다. 일촉즉발에 팽팽한 대치상황 나?당연합군에 의해 위압당한 예식진은 영달과 파멸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암호문 같았던 묘지명의 의미도 이제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었다. ‘점풍이역 취일장안’

 

노중국 교수

“점풍은 바람을 점친다. 바람이 어디로 갈거냐? 어디로 불거냐? 그는 백제지역에서 앞으로 자기의 거취. 거취라는 것은 ‘당한테 항복할 것이냐 아니면 저항할 거냐’ 이러했을 때 자기 나름대로 이제 점처봤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계산을 했다는 말입니다.”

 

占風. 웅진성의 깊은 곳에선 이미 새로운 힘을 따르고 있었다. 그날 웅진성의 결정권자는 예식장군이었다.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의 체포는 전투중지 명령이자, 백제 칠백년 역사의 끝이었다.

 

‘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 정말 충격적입니다. 항상 이런 위기의 순간에는 내부에 배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역설적으로 한반도에 삼국이 대립하고 있을 시절에는 당나라가 오히려 고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백제라는 한 축이 무너진 이후에는 불과 8년 뒤인 668년 신라의 지원을 받은 당나라군에 의해서 고구려도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결국 예식진의 배신행위는 동북아의 거대한 주춧돌 하나를 뽑아 버린 셈이 됐습니다. 이 이후로 동북아의 국제 질서는 중국 중심으로 고착화 됩니다.

 

 

부여 고란사에는 삼천궁녀의 최후를 받은 벽화가 있다. 나?당연합군에 쫓겨 낙화암에서 뛰어든 궁녀들 그러나 삼천궁녀의 이야기는 후대의 문인들이 지어낸 허구일 뿐이었다. 그것은 망국의 왕이 짊어 줘야 할 숙명이었다.7) 의자왕은 당에 끌려와 곧바로 배신의 응어리를 안고 북망산의 고혼이 되었다. 의자왕의 측근에서 당황제의 충신으로 변신하여 화려한 삶을 산 예식진. 그에겐 대당 좌위위 대장군 그것이 조국 백제보다 소중했다.

 

 

묘지명은 그에 대한 화려했던 당황제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672년 12년의 짧은 기간 동안 당에서의 영화를 뒤로 하고 예식진은 58세로 사망한다. 황제는 조칙을 내려 최후의 예후로 고위 관료들이 묻히는 고엔위안에 그를 안장했다.

 

 

지난 2000년 중국 북망산에서 가져온 흙으로 1340년 만에 전쟁포로였던 백제 의자왕의 고혼을 안치해 와 부여 능산리에 안장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주군을 등졌던 예식진. 그에게도 한 점 회한이 남아 있었을까? 예식진의 묘지명은 오늘 의자왕의 오욕을 벗겨주고 있다.

 

오늘 역사추적은 이처럼 예식진이라는 인물의 묘지명을 통해서 무려 1348년 동안이나 까마득하게 무쳐져 있었던 역사의 진실 그 한 단면을 확인했습니다. 물론 예식전 묘지명에 정확한 의미는 앞으로도 연구가 계속돼야 할 역사학계의 과제일 겁니다. 제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북망산에 고혼이 된 의자왕의 가묘입니다. 내리는 눈발이 마치 의자왕의 누명을 벗겨주는 서설 같습니다. 오늘 역사추적이 모든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역사에 조롱거리가 돼 왔던 의자왕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에 첫걸음이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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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새롭게 하루 시작
글쓴이 : 법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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