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맑고 푸른 가을의 기운을 만끽해보고 싶은 마음에 충남 바닷가로 차를 몰았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회사일 때문에 여름휴가를 가지 못했었는데 마침 개천절 연휴를 활용하여 가족과 더불어 휴식의 시간을 가진 것이지요.
홍성과 태안 그리고 백제고도 부여를 둘러보는 계획을 했지만 마음에는 진작부터 영모리 문헌서원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수년 전 남도 광주에서 근무할 때 시간을 내서 둘러보기는 했었지만 그 당시에는 지방문화재로 정부 예산을 받아 한참 공사중에 있었기에 목은 산소만 둘러보았는데 모든 공사가 끝난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고향 청주에 남아 있는 6촌 형제들은 여행삼아 단체로 방문을 했지만 그마저도 지리적으로 떨어진 나는 그 모임에 합류를 하지 못했었거든요.
목은의 후손으로서의 자긍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여행이었습니다.
<문헌서원>
가정 이곡(1298∼1351)과 목은 이색(1328∼1396)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이곡은 고려 후기 학자로서 이색의 아버지이다.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았고, 문명을 떨쳤다. 이색은 고려 후기 문신이며 학자이다. 원·명교체기에 친명정책을 지지하였고,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문헌서원은 선조 27년(1594)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광해군 2년(1610)에 한산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이듬해에 나라에서 문헌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고 인재 이종학·음애 이자·배옥헌 이개 등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 그 후에도 처음 문헌서원이 있던 곳에 단(壇)을 만들고 분향해 오다가 1969년 지금 있는 자리에 다시 짓고 문양공 이종덕 한 분을 더하여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해마다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연 혁 문헌서원은 이 지역을 본관지로 하는 한산이씨 명조 선현 6위를 제향하는 서원으로 기산면 영모리에 있다. 최초창건은 1594년(선조 27)으로 전해지며 처음 이름은 ‘효정사(孝靖祠)’이다. 1611년(광해군 3)에 문헌(文獻)이라 사액 받았다. 제향인물은 이곡(李穀), 이색(李穡), 이종학(李種學), 이종덕(李種德), 이개(李塏), 이자(李耔)이다.
문헌서원의 최초 창건연대는 정확한 기록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단지 이성중(李誠中)이 재임하던 1580년대 초반이라고 보여지나, 기록상 창건연대는 1594년(선조 27)으로 전해진다. 이 효정사는 그 후 정유왜란으로 소진되어 겨우 사우만이 남아 있었는데 1610년(광해군 2)에 관찰사 정엽(鄭曄)과 정언 이경탁(李慶倬: 명곡 이산보의 아들)등이 이를 애석하게 여기고 이건을 계획하여 이듬해에 동재, 다음해에 강당을 건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서원의 재건과 때를 같이하여 1611년(광해군 3)에는 ‘문헌(文獻)’으로 사액을 받게 되는데 이경함(李慶涵), 이덕형(李德馨), 이경준, 이경전, 이현영(李顯英), 이경탁, 이임 등등의 협조와 지원이 컸었고 이때에 이종학(李種學)과 이자(李耔) 2위를 추배하여 모두 6위를 제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서원재건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문묘배향 논의와도 때를 같이하고 있었으며 특히 이 과정에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이색의 행적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를 역설하면서 이 서원의 운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문헌서원지에 의하면 창건 후 원장으로 송준길, 윤증(尹拯), 남구만(南九萬), 권변(權抃) 등이 기록되고 있으며 우암 송시열은 ‘문헌서원’이라는 액호를, 진수당(강당), 존양재(동재), 석양재(서재)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이 썼다고 한다. 1713년(숙종 39)에는 백옥헌 이개(白玉軒 李塏)를 추가로 추배하여 모두 5현이 제향되게 된다. 문헌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고, 1891년 옛 터에 단을 설치하고 제향하였다. 서원구지(書院舊誌)에 의하면 이 설단 당시 한산 향현사에 제향되던 ‘한산 6군자(현암 이종덕, 어성 신심, 남강 이염, 과묵당 홍미, 복천 강학년, 지족당 권양)’을 함께 제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00여년이 지난 1967~1968년에 종족들에 의하여 중건이 발론되고 후손들의 합력으로 영모리 동쪽의 현재위치로 1969녀에 이건하게 된다. 이 해에 현암 이종덕(玄巖 李種德)을 추배하여 현재의 제향인물은 가정 이곡(稼亭 李穀), 목은 이색(牧隱 李穡), 현암 이종덕, 인재 이종학(麟齋 李種學), 백옥헌 이개(白玉軒 李塏), 음애 이자(陰崖 李耔) 등 6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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